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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벨기에는 어떻게 한국과 혈맹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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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한국과 벨기에가 수교한 지 120주년 되는 해다.

양국은 지정학적으로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작지만 강한 나라’라는 공통점이 있다.

 

 

벨기에는 고종의 요청으로 대한제국과 외교를 맺은 유일한 나라다.

1901년 대한제국은 벨기에와 우호·통상·항해 조약을 체결했다.

고종은 국제사회로부터 영세 중립국으로 인정을 받아야 주권을 지킬 수 있다고 인식했다.

당시 열강들 사이에서 중립국으로 주권을 유지하던 벨기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추진한 모델이었다.

 

한국과 벨기에는 지정학적으로 유사점이 많다.

한국이 중국과 일본의 침략으로 부침을 겪은 역사가 있다면,

벨기에는 독일, 프랑스 등 주변 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어 시련을 겪었다.

 

올해는 벨기에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70주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끝난 후 1948년 벨기에는 대한민국 정부를 처음으로 인정한 국가들 중 하나였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벨기에는 1951∼1953년 유엔군의 일원으로 3171명을 파병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앙리 모로 드믈랑은 장비만 지원하자는 국무위원들의 제안을 일축하고 파병을 강하게 주장해 관철했고 직접 참전했다.

 

드믈랑은 나중에 펴낸 회고록에서

“한국전쟁은 한 국가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한국은 벨기에처럼 열강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이기에 같은 처지의 한국을 도와야 했다”고 밝혔다.

 

한국전쟁에선 벨기에의 참전용사 106명이 전사하고 350명이 부상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벨기에의 가톨릭 사제들은 한국으로 건너와 국가 재건을 도왔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간호 장교로 참전했던 테레즈 캄비에 수녀는 종전 후 한국에 남아 가난한 사람들과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복지 사업에 헌신했다. 1959년 벨기에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지정환 신부(디디에 테스테븐)는 1967년 전북 임실에서 한국 최초로 치즈 공장을 설립하고 지역 주민과 협동조합을 만들어 농촌 발전에 기여했다.

 

27년만에 국빈방문한 벨기에의 필립 국왕과 마틸드 왕비

 

벨기에는 한국전쟁에 자국 군인을 파병하였고,

한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자

벨기에의 한국전 참전용사에게 마스크를 전달하며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참고 : < M 인터뷰-피터 레스꾸이에 >"우리와 같은 처지 韓 돕자".. 한국戰 당시 3171명 파병 (daum.net)